• 봉황 (鳳凰)과 봉란대(鳳卵臺)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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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2758, 2009-04-21 07:03:04(2008-08-01)
  • 봉황(鳳凰)은 배달나라의 새이기도 하지만 강씨를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진주강씨는 봉황의 전설이 있기에 책자나 친목회를 만들 때 봉황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봉(鳳) 은 새 조(鳥) 자가 안에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새중의 새'를 뜻한다.

    황(凰)은 임금 황(皇) 이 안에 들어가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임금 황(皇)의 새' 뜻한다.

    그런데 '황(皇)' 은 '白王' 즉 '배달나라의 왕'을 뜻한다.

    중국에 황제가 나타난 것은 '진시황' 때 부터 이다.

    ('진시황'의 '시황'은 시작하는 황제, 첫 황제라는 얘기다.)

    진시황 이전에는 배달민족의 나라 (배달한국,고조선)의 임금이 황제였고

    그래서 황(皇) 자는 '배달나라의 왕'을 뜻하는 '白王' 을 쓴 것이다.

    중국의 옛날 역사책에는 배달민족은 백민(白民)으로 나온다.

    (밝달(밝은 땅) -> 박달 -> 백달 -> 배달)

    그러므로 '봉황(鳳凰)'은 '새중의 새, 배달나라 임금의 새'를 뜻하는 일이고

    왕이 있는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도 청와대의 상징문양으로 쓰이는 것이다.




       비봉산과 봉알자리                

    진주시 상봉동 972-1번지 일원의 진산(鎭山)이다.

    비봉(飛鳳)은 봉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봉이 항상 날고 있다는 것으로, 선비가 많이 배출된다는 뜻이다.

    '진양지'의 월아산조에 이르기를 "산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있어 예로부터 정승이나고, 산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장수가 날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비봉산을 대봉산(大鳳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비봉산을 마주보는 상봉서동 주택가 평지에 흙으로 쌓아올려 산과 같이 되어 있으며 그 복판이 패여서 마치 새들의 알자리 같이
    되어 있는 것이 "봉알자리"인데 상봉동 911-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봉알자리는 가야시대의 고분인 것으로 전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진주 강씨들 집안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고 대봉산( 현 비봉산)밑에웅거하여 권세를 부렸으니, 세상사람들이 대봉산 위에
    봉암(鳳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봉암을 깨어 없애고 봉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하니 날아간 봉을 다시 부르려면 알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봉알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 : [기타] http://tour.jinju.go.kr/02/01_03_02.php



                  구기택지(舊基宅地) 와 봉란대(鳳卵臺)의 유래         

    20030430.jpg 


     시전(詩傳)  권아장(卷阿章)에 보면

                鳳凰鳴矣 于彼高崗 

                梧桐生矣 于彼朝陽        

                鳳鳳처처 옹옹諧諧

           봉황새가 우네 저 높은 산등성이에서 
            오동나무능 아침 햇살을 받고 자라고 있구나
            열매가 주롱주롱 잎이 너울너울 하니 웽웽 꺄꺄 하도다.

    고서에 전해오는 것을 보면 봉황은 신조로서 오동이 아니면 앉지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중국에서 태평한 때에 단물이 솟는다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고 몸의 깃털은 오색찬란하여
    소리는 음에 맞으며 군자가 따른다고 한다

    진주 봉곡촌 택지를 예기하려면 우리 진주강씨 흥망성쇄와 파란 곡절이 얽히고 대봉산 봉지 봉바위, 봉란대, 봉강재의
    피눈물나는 사연을 예기 않을 수 없다.

    고려 시대에는 우리 강씨들이 정부 요직 높은 벼슬자리에 많이 계셨기 때문에 세도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영상서(領尙書) 정절공(正節公) 諱 구만(九萬-- 서기 931~975)의 집뒤에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의 형상과
    같으므로 봉바위라 하였다.


     어느날 강남도사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 이 바위를 보고 하는말이 ' 姜氏之大姓 이 有此岩故也라 ' 즉 [강씨의 대성이
    이 바위로 인하여 그렇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상서좌복야 (尙書左僕揶) 증서문하시중평장사 (中書門下侍中平章事) 휘(諱) 홍(洪 1010~1122)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형제 열한사람이 정승으로서 한나라의 정권을 한 집안에서 장악하다 싶이 하였으니 그 부귀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호사다마 (好事多魔)로 남이 잘되는 일에 시기하는 자가 있기 마련인가 보다.

    합문지후閤門紙候 이지원이라는 자가 구 세력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강시를 모함하여 가만히 사람을 시켜 봉버위를 격파하니
    그 바위 속에서  박과 같이 생긴 흰돌이 네개가 있으므로 이를 철주로 부수니 세빨간 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인종 (1123~1146 )때에 척준경이 임금에게 고하기를 "상서 강홍의 형제들 일당이 불의의 양심을 품고 있으니
    조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것"이라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인종은 깜작 놀랐다 "어떻게하면 강홍 일가의 세력을 꺽을 수 있게는가 ?" 하고 물으니 척준경은 말하기를
    "강홍과 그의 도당들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 진주에 명소 지명을 고치소서" 하니 인종은 그말을 옳다고 여겨...
    상서공 강홍의 형제와 일족 20명을 죽이고 대봉산의 산이름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부지(釜池)라 고쳤던 것이다.

    이때가 1126년 인종4년 2월 척준경이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권을 범했을 때로 추정된다

    한번은 어느 도승이 봉곡촌을 지나다가 선대의 사적을 듣고 말하기를 "날으는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드소서" 하므로 도승의 말대로 봉곡촌 중앙 동산에 봉황새의 알자리 봉란대(鳳卵臺) 1200~1300년경 만들었고
    그 후손들이 이 자리에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휘(諱) 이식 장군의 유허비를 세운것이다.

    그리고 대봉산 지맥 봉래산  밑에 자손들의 교육울 위한 서재를 마련하고 재호를 봉강재라 하여 자녀들의 교육에 임하고
    그 유지재산으로 대봉산 전역의 임야와 샘골에 전답과 봉강재의 터 등 많은 문중재산울 가졌다

     참고  :   봉란대 조성은 서기 1200~1300년 사이로 추정되며 유허비는 비면에 대종찬이 세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700년 초 이후로 보아진다 이는 대종찬을 찬하신 강석하( 1644~1707)선조님이 1700년대 초 인물이기 때문이다.

     출처 : 진주강씨 대전종회  글 강성덕





       봉황(鳳凰)과 오동(梧桐)나무      

    고서에 의하면 봉황은 신조(神鳥)로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않고...]하였으니 우리 진주강씨와 관련된 봉황이 다시
    날아들 수 있도록 한 봉란대가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봉황과 오동나무에 대하여 알아보자.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텃밭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오동나무는 잘자라서 딸애 나이가 차 혼사가 정해지면 그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혼수로 장농을 만들었다
    오동은 현삼과의 식물로 낙엽활목교목으로 높이는 15미터 정도이며 앞은 마주나고 5~6월 사이 보라빛 꽃이피고
    열매는 달걀모양의 삭과로 10월에 익는다.

    오동(梧桐)의 "梧"자와 "桐"의 각각 다른 두가지 나무이다.梧(벽오동 오)는 수피가 푸른 청동(벽오동)인데 참오동이라고도 하며
    桐(오동나무  동)수피가 흰 백동(白桐)을 말한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무늬도 고울 뿐더러 물에 잘 젖지 아니하며 휘거나 트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아 청아한 음율을 내는
    악기나 고급가구의 재료로 쓰인다.우리가 귀중한 골등품을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는 것도 니 떼문이다.
    벽오동은 깨끗하고 귀족이며 우아한 선비를 상징한다.특히 이나무는 봉황이 깃들인다는 길상의 나무이다.

     고서에 의하면 봉황은 신조(神鳥)로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않고...]하였으니 우리 진주강씨와 관련된 봉황이 다시
    날아들 수 있도록 한 봉란대가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봉황과 오동나무에 대하여 알아보자.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텃밭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오동나무는 잘자라서 딸애 나이가 차 혼사가 정해지면 그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혼수로 장농을 만들었다
    오동은 현삼과의 식물로 낙엽활목교목으로 높이는 15미터 정도이며 앞은 마주나고 5~6월 사이 보라빛 꽃이피고
    열매는 달걀모양의 삭과로 10월에 익는다.

    오동(梧桐)의 "梧"자와 "桐"의 각각 다른 두가지 나무이다.梧(벽오동 오)는 수피가 푸른 청동(벽오동)인데 참오동이라고도 하며
    桐(오동나무  동)수피가 흰 백동(白桐)을 말한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무늬도 고울 뿐더러 물에 잘 젖지 아니하며 휘거나 트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아 청아한 음율을 내는
    악기나 고급가구의 재료로 쓰인다.우리가 귀중한 골등품을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는 것도 니 떼문이다.
    벽오동은 깨끗하고 귀족이며 우아한 선비를 상징한다.특히 이나무는 봉황이 깃들인다는 길상의 나무이다.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한다.

    봉황에 대하여는 서경 익직편(書經 益稷篇)에 소소구성(蕭韶九成)하니 봉황래의(鳳凰來儀)라 하였는데 소소(蕭韶)는
    순(舜)임금이 만든 퓽류의 이름이고 구성은 아홉번 곡을 바꾸어 연두 한다는 뜻이니 즉 흥겹게 음악을 연주하니
    이때 봉황이 날아와 춤을추며 의식을 빛낸다 하였고 또 이아석조문에는 봉황은 상상의 신령한 새로서 성왕이 태평성대를
    건설할때에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새로 예천의 물을 마시고 죽실竹實을 먹으며 벽오동나무에만 깃드는데 형상은 전면에는
    기르기 처럼 생겼고 후면은 기린 처럼 생겼는데 뱀의목, 물고기의 꼬리, 용의무늬, 거북의 등, 닭의 부리, 제비의 턱의
    모양을 하하였다 하며 머리는 德을 이고 목에는 義를 매달고 등에는 仁을 지고 가슴에는 信을 품고 날개에는 禮를 끼고
    발로는 文을 밟고 꼬리에는 武를 매달았으니 오색찬란한 봉황이 나타나면 모든 짐승과 들짐승들이 뒤따르며 유수하게
    노래하여 극락세계를 인증한다 하였다.

    그리고 전해오는 문헌에 의하면 출어동방군자지국(出於東方君저子之國)
    고상사해지외(고翔四海之外)  천하대안령
    (天下大安寧)이라 즉 "동방군자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를 날아다니고 이 새가 나타나면 청하가 평안하다"고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데로 "봉황은 신조로서 ... " 한것처럼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라고 하는데 봉황은 자웅 사이가 아주좋아
    부부애를 상징하며 배개에 수 놓은 것도 이들의 사랑을 베우려는 의도이다

    달처럼 정성을  다해 키운 오동나무는딸의 혼처가 정해지면 가차없이 베느 것이다.
    이것은 봉이 이미 내려앉은 나무  즉 그 사내가 딸의 배필이 된다면 다른 봉은 필요없는 까닭에 또 다른 봉이 내려앉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아예 베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는 오동은 정원수로도 재배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유서 깊은 봉란대에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어 봉황이 깃들게 하자.
    강문의 융성한 발전을 위하여.....
       

                   주자의 권학시(勸學詩)를 보면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운데

                 촌각의 시간도 기벼이 하지 못한다

                 못가의 봄풀은 아직 봄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섬돌 앞의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낸다.

             해설 : 떨어지는 오동잎을 학문의 未完에 비겨
                             세월이 무상하게 흘러감을 노래하고 있다

                      

                 출처 : 진주강씨 대전종보 제 57호 2005년 9월 30일자 게제 
     

                 참고 ; 현재 봉란대를 문화재로 지정건의를 한바 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심의중에 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우측 아래쪽에서 신장석(神將石)이 발견 되어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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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뿌리없는 나무에 잎이 피지 않듯이
       숭조는사람의 도리이다.
     

    * 글은 인터넷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코멘트 부탁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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